
정주행은 몰입, 플레이는 중독이라 부르는 사회
요약
본 기사는 게임에만 유독 과몰입을 규제하고 질병으로 진단하는 사회적 현상을 분석합니다. 과거 소설이나 TV 등 다른 매체는 유사한 논의가 있었으나, 오직 게임만이 국가적 규제와 의학적 진단 대상이 된 배경을 탐구하며 그 비대칭성을 지적합니다.
핵심 포인트
- 게임 과몰입은 유독 규제 및 질병화 대상으로만 남음.
- WHO는 2019년 게임 이용 장애를 국제질병분류에 등재했으나 학계 반발도 존재함.
- 전문가들은 게임 중독을 독립된 질환이 아닌 다른 정신 건강 문제의 증상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함.
- 소설과 만화, TV를 거쳐 온 도덕적 공황이 게임에서 멈추지 않는 이유
※ AI 생성 이미지
정주행은 몰입, 게임은 중독
2021년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 공개되자 언론은 일제히 시청자들이 밤새 정주행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하룻밤에 아홉 시간 분량을 몰아본 시청자들은 웰메이드 콘텐츠를 알아본 안목 있는 소비자로 그려졌습니다. 같은 해 여성가족부는 청소년이 자정 넘어 게임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막는 셧다운제를 두고 존폐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하룻밤 아홉 시간을 드라마에 쓰면 몰입이 되고, 게임에 쓰면 규제 대상이 되는 셈입니다.
이 대비는 제도로도 이어집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게임문화재단은 게임과몰입힐링센터를 운영하며 게임 과다 이용 청소년과 가족에게 상담을 제공합니다. 반면 웹툰이나 웹소설을 밤새 몰아본 청소년,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 몇 시간씩 영상을 넘긴 청소년을 위한 국가 상담기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웹툰 플랫폼 역시 다음 화 미리보기나 매일 무료 대여 같은 장치로 정주행을 유도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이런 설계는 규제나 상담 대상으로 논의된 적이 거의 없습니다. 2019년에는 세계보건기구가 게임 이용 장애를 국제질병분류 11판에 정식 진단명으로 등재하기까지 했습니다. 과도한 정주행이나 과도한 완독에 대응하는 진단명은 여전히 없습니다.
왜 유독 게임만 국가가 시간을 규제하고, 상담기관을 따로 두고, 의학계가 질병으로 분류하는 대상으로 삼았을까요. 소설은 18세기 유럽에서 젊은 여성을 타락시킨다는 비난을 받았고, 만화책은 1950년대 미국에서 청소년 범죄 원인으로 지목되어 의회 청문회까지 열렸습니다. 텔레비전과 록 음악도 시대마다 똑같은 혐의를 받았습니다. 그 혐의들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며 사그라들었고, 지금 소설 중독이나 TV 중독을 법으로 규제하자는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게임만 유독 규제와 진단 대상으로 남은 이유를 매체 속성에서 찾아야 할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지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게임만 병이 되었다
WHO ICD-11 등재와 그 반박
출처: WHO
세계보건기구는 2019년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보건총회에서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판을 채택하며 게임 이용 장애를 정신 및 행동 장애 항목에 포함시켰습니다. 이 개정판은 2022년 1월부터 공식 발효되었습니다. 진단 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게임 이용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다른 일상보다 게임을 우선하고, 부정적 결과가 뒤따라도 게임을 지속하거나 늘리는 상태가 12개월 이상 이어져 개인, 가족, 사회 영역에서 심각한 손상을 일으켜야 진단이 내려집니다.
그런데 이 등재 과정부터 학계 내부에서 반발이 있었습니다. 아르세트를 비롯한 학자 36명은 2016년 학술지 저널 오브 비헤이비럴 어딕션스에 반대 성명을 실었습니다. 이들은 근거가 되는 연구 대부분이 표본 수가 적고 방법론이 제각각이며, 게임 과몰입을 독립된 질환이 아니라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ADHD 같은 다른 문제의 결과로 나타나는 증상으로 봐야 한다는 연구도 상당수라고 지적했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 진단명부터 만들면 낙인 효과와 불필요한 규제만 늘어난다는 우려였습니다. 실제로 미국정신의학회는 2013년 DSM-5를 개정하면서 인터넷 게임 장애를 부록에 넣었지만, 정식 진단명이 아니라 추가 연구가 필요한 상태로만 분류했습니다.
출처: Oxford Internet Institute
옥스퍼드 인터넷 연구소 앤드류 프시빌스키 연구팀은 청소년 수만 명 데이터를 분석해 게임 이용 시간과 심리적 웰빙 사이 상관관계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거나 극히 미미하다는 결과를 여러 차례 내놓았습니다. 진단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면 정상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다수 이용자까지 잠재적 환자로 분류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뒤따랐습니다.
이런 논쟁 자체가 게임과 다른 콘텐츠 사이에 존재하는 비대칭을 보여줍니다. 과도한 정주행이나 몰아 읽기를 다루는 국제질병분류 항목은 어느 개정판에도 없었고, 그런 항목을 만들자는 학술 논의조차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게임만 유일하게 국제 의료 분류 체계 안에서 정식 병명 지위를 둘러싼 공방을 거쳤습니다.
낯선 매체를 향한 오래된 공포
소설에서 록 음악까지
※ AI 생성 이미지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비슷한 공포가 반복됐습니다.
1774년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자 유럽 곳곳에서 모방 자살이 보고되었고, 덴마크와 이탈리아 일부 지역은 이 책 판매를 금지했습니다. 당대 의사들은 젊은 여성이 소설을 지나치게 읽으면 판단력을 잃고 신경쇠약에 빠진다며 이를 독서열이라 불렀고, 실제 치료를 권하기도 했습니다.
1954년에는 정신과 의사 프레드릭 웨덤이 순수의 유혹을 출간해 만화책이 청소년 비행을 조장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같은 해 미국 상원 청소년비행소위원회가 청문회를 열어 만화 산업 관계자들을 불러 세웠고, 결국 업계는 자율 검열 기구 코믹스코드어소리티를 만들어 폭력, 범죄 묘사를 스스로 걸러내야 했습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텔레비전이 표적이 되었습니다. 1972년 미국 공중보건국장 보고서는 TV 폭력 시청과 아동 공격성 사이 연관성을 경고했고, 텔레비전은 한동안 바보상자라 불리며 아이들 정신을 망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1985년에는 티퍼 고어가 이끄는 학부모음악자료센터가 록 음악 가사 선정성과 폭력성을 문제 삼아 상원 청문회를 이끌어냈습니다. 이때 이른바 필시 피프틴이라는 문제 음악 15곡 목록까지 만들어 배포했고, 그 결과로 음반에 부모주의보 라벨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네 사례 모두 패턴이 같습니다. 신흥 매체가 등장하면 기성세대가 도덕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청문회나 검열 기구가 뒤따르고, 시간이 지나면 그 매체는 주류 문화로 흡수되며 공포는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사례에서도 국제질병분류 같은 의료 체계 안에 정식 진단명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소설 중독, 만화책 중독, TV 중독, 록 음악 중독이라는 병명은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게임만이 이 패턴을 그대로 밟으면서도 유일하게 실제 진단명 등재까지 이어졌습니다. 게임에는 이전 매체에 없던 요소가 실제로 있는지부터 살펴봐야겠습니다.
게임에만 있는 세 겹의 설계
게임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요소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심리학자 클라크 헐은 1932년 쥐 실험에서 목표에 가까워질수록 개체가 더 강하게 노력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후 커피 전문점 스탬프 카드를 이용한 인간 대상 연구(키베츠, 우르민스키, 정 2006)에서도 같은 효과가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출처: Wekipedia
여기에 1927년 심리학자 자이가르닉이 밝힌 자이가르닉 효과, 즉 완결되지 않은 과제를 완결된 과제보다 더 오래 기억하고 신경 쓰는 현상도 겹칩니다. 경험치 바나 진행률 표시가 몇 퍼센트 남았는지 계속 보여주는 설계는 이 두 원리를 그대로 씁니다. 이 원리는 결제 여부와 무관하게 작동합니다.
마인크래프트는 확률형 아이템이 전혀 없는 일회성 구매 게임이지만 결말 자체가 없는 샌드박스 구조로 2023년 기준 3억 장 넘게 팔린 역대 최다 판매 게임입니다. 스타듀밸리 역시 개발자 한 명이 만든 프리미엄 게임인데 계절이 순환하며 사실상 끝나는 지점이 없습니다.
스팀 업적 시스템에서 특정 게임 100퍼센트 달성 비율이 이용자 가운데 한 자릿수 퍼센트에 그친다는 통계가 자주 인용되는데, 이 역시 완결을 향해 계속 플레이하게 만드는 압력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증거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는 애초에 결말이 정해져 있어 이런 무한 진행 구조 자체를 만들기 어렵습니다.
Schedules of Reinforcement(출처: simplypsychology.org)
여기에 확률형 아이템은 도박 기제를 한 겹 더 얹은 특수 사례입니다. 심리학자 스키너는 1950년대 비둘기와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보상이 나오는 시점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변동비율 강화 방식이 다른 어떤 보상 방식보다 행동을 끈질기게 반복시킨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슬롯머신이 바로 이 원리로 작동하고, 확률형 아이템과 가챠 시스템도 같은 원리를 그대로 씁니다.
국내 한 모바일 게임은 최고 등급 캐릭터 획득 확률을 0.6퍼센트로 공지한 적이 있고, 이런 낮은 확률은 다음 한 번이면 될 듯하다는 기대를 계속 자극합니다. 2021년 넥슨 메이플스토리에서는 공지한 확률과 실제 확률이 다르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이용자 집단 반발로 이어졌고, 결국 2024년 3월부터 게임산업법 개정으로 확률형 아이템 확률 정보 표시가 법적 의무가 되었습니다.
수익 구조도 이 지점에서 갈립니다. 업계에서 자주 인용되는 조사에 따르면, 무료 이용 게임 매출 절반가량이 전체 이용자 가운데 1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소수 결제자에게서 나옵니다. 업계는 이들을 고래라 부르고, 게임 설계 자체를 이 소수 고액 결제자가 계속 결제하도록 최적화합니다. 책 한 권이나 영화 한 편은 값을 한 번 치르면 거래가 끝나기 때문에, 제작사가 개별 이용자 반복 소비를 유도할 상업적 유인이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다중접속 게임에는 여기에 사회적 장치까지 더해집니다. 길드 레이드는 정해진 요일과 시간에 여러 명이 모여야 진행되므로 한 사람이 빠지면 나머지 팀원에게 피해를 줍니다. 매일 접속하면 보상을 주는 출석 시스템, 기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시즌 패스도 이탈 시점을 늦추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의무감과 상실 회피 심리는 혼자 읽는 책이나 혼자 보는 영화에는 없는 압력입니다.
그 설계는 이제 게임 밖에도 있다
출처: 각 브랜드 About us
그런데 최근 10년 사이, 다른 콘텐츠도 게임과 똑같은 설계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흐름은 확률형 아이템이나 알고리즘보다 먼저, 목표 구배 효과와 자이가르닉 효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넷플릭스는 회차가 끝나면 다음 화가 재생되기까지 남은 시간을 화면에 초 단위로 띄우는 카운트다운 장치를 씁니다. 목표에 가까워질수록 멈추기 어려워지는 목표 구배 효과를 그대로 응용한 설계입니다.
언어 학습 앱 듀오링고는 연속 학습일수를 스트릭으로 표시하고 하루라도 접속을 거르면 이 수치를 0으로 되돌리는데, 목표 구배 효과와 손실 회피 심리를 함께 이용합니다. 링크드인은 프로필 완성도를 퍼센트로 보여주며 100퍼센트를 채우도록 유도하고, 틱톡과 인스타그램처럼 애초에 끝이 정해지지 않은 피드 구조는 자이가르닉 효과가 만드는 미완결 긴장을 게임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용합니다.
출처: 넷플릭스
변동비율 강화와 참여 최적화 알고리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넷플릭스는 2012년 무렵부터 한 회차가 끝나면 다음 회차를 자동으로 재생하는 기능을 넣었습니다. 이 기능이 도입된 뒤 이용자 한 명이 한 번에 시청하는 분량이 늘었다는 사실은 여러 조사에서 확인됩니다. 넷플릭스는 오징어 게임 시즌1이 공개 28일 만에 전 세계에서 16억 5천만 시간 시청되며 자사 오리지널 사상 최다 기록을 세웠다고 발표했고, 이 수치는 몰입도 높은 콘텐츠라는 증거로 언론에서 긍정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유튜브 역시 전체 시청시간 가운데 70퍼센트 이상이 추천 알고리즘을 거쳐 발생한다고 회사 스스로 밝힌 적이 있습니다. 이 알고리즘을 설계했던 전직 엔지니어 기욤 샤슬로는 알고리즘 목표 자체가 시청시간 극대화였다고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숏폼 플랫폼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틱톡은 2023년 만 18세 미만 이용자가 하루 60분을 넘기면 이용시간을 알리는 알림을 넣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업계 스스로 자기 설계가 과몰입을 부른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입니다. 미국 비영리기관 커먼센스미디어가 2021년 진행한 조사에서는 미국 청소년 하루 평균 화면 이용시간 가운데 게임보다 온라인 동영상과 소셜미디어 비중이 더 크다는 결과도 나왔습니다.
이 지점에서 앞서 짚은 대비가 흔들립니다. 목표 구배 효과, 자이가르닉 효과, 변동비율 강화, 참여 극대화 알고리즘은 이제 게임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짜 구분선은 게임이라는 매체 자체가 아니라, 참여 최적화를 목적으로 데이터 기반 설계된 콘텐츠인지 여부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게임은 이런 설계를 가장 먼저, 가장 노골적으로 도입한 산업이었을 뿐이고, 규제와 진단 체계가 그 시점 인식에 머물러 있는 사이 다른 산업은 이미 같은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결론
구분선은 매체가 아닌 설계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을 종합하면 결론은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게임이라는 매체 자체가 다른 문화 콘텐츠보다 본질적으로 위험하다는 근거는 약합니다. 소설, 만화책, TV, 록 음악도 저마다 등장할 때 똑같은 도덕적 공황을 거쳤고, 게임에 대한 의심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다만 실제로 존재하는 차이도 있습니다. 목표 구배 효과와 자이가르닉 효과를 이용한 무한 진행 구조는 결제 여부와 무관하게 게임 전반에 깔려 있고, 확률형 아이템은 여기에 도박 기제를 얹었으며, 길드 레이드나 시즌 패스 같은 사회적 장치는 이탈 자체를 막습니다. 이 세 겹이 겹쳐 게임을 유독 규제와 진단 논의 한가운데 세워둔 실질적 이유입니다.
문제는 이 세 겹 모두 더는 게임에 갇혀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넷플릭스 카운트다운과 듀오링고 스트릭은 목표 구배와 자이가르닉 효과를, 넷플릭스 자동재생과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은 변동비율 강화를, 틱톡과 인스타그램 무한 피드는 사회적 락인을 게임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용합니다. 그렇다면 정책과 진단 체계가 물어야 할 질문도 바뀌어야 합니다. 어떤 매체인지가 아니라, 어떤 설계가 이용자 통제력을 실제로 빼앗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런 전환이 이미 시작된 사례도 있습니다. 유럽연합은 2024년부터 전면 시행한 디지털서비스법에서 게임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용자 판단을 왜곡하는 조작적 인터페이스 설계 자체를 규제 대상으로 명시했습니다. 반면 한국 게임산업법은 확률형 아이템 표시 의무를 게임에만 적용하고,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추천 알고리즘이나 무한 스크롤 설계는 규제 밖에 둡니다. 게임에만 셧다운제를 적용하고 힐링센터를 두면서 정작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다른 플랫폼은 그대로 두는 지금 방식은 낡은 표적을 향한 오래된 습관에 더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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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만화, TV를 거쳐 온 도덕적 공황이 게임에서 멈추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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